버려진 고향,
버려진 주민들

버려진 고향,

버려진 주민들

핵발전소 사고 3년, 일본 현지 르포 ···
후쿠시마에 남겨진 그리고 떠난 사람들이 말하는 “핵발전소 참상 보여 주는 증거들”

후쿠시마(일본)=글 길윤형 기자, 교토(일본)=글 박현정 기자, 김성환 기자 사진·영상 정용일 한겨레21 기자

"이곳이 이타테무라 사무소(한국의 면사무소)입니다. 모두가 피난을 갔지요."

지난 3월5일, 일본 도쿄를 출발해 4시간을 달려 도착한 후쿠시마현 이타테무라 사무소는 텅 비어 있었다. 사무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니, 제염 작업을 위해 사무소 구석을 빌려 쓰는 업자 두세 명이 어색하게 일어나 일행을 맞았다. 1층 입구를 중심으로 가장 가까운 쪽부터 주민과, 세무과, 건강복지과 등의 팻말이 이어진다. 물론 모두가 피난을 떠난 탓에 직원들의 모습을 볼 순 없었다.

제염 작업 아직 시작도 못한 곳도···

이타테무라는 주민들의 노력으로 와규(일본소)를 특산물로 만들었던 마을이다. 그러나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면서 마을 대부분은 거주제한구역으로 변했다. 그동안 주민들이 들인 노력도 물거품이 된 셈이다.

사무소 마당엔 겨울 동안 내린 눈이 녹지 않은 채 수북이 쌓여 있었고, 눈 속에 파묻힌 방사선 선량계는 2.5마이크로시버트(μSv)를 가리키고 있었다.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제1원전 사고가 발생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지역 주민들의 상처는 아직 그대로였다. 후쿠시마 제1원전의 남쪽 나라하마치의 주민 마쓰모토 기이치(65) 전 정(町·한국의 면 단위)의원도 지난 사고로 마을을 떠나야 했다. 3년 전 '그날'은 그가 의원으로 재직하던 정의회의 회기 마지막 날이었다. 나라하마치엔 원자로 4기로 이뤄진 후쿠시마 제2원전이 들어서 있다. 보통 핵발전소는 13개월을 사용하면 정기 점검을 해야 하는데 이를 24개월로 연장하는 문제에 대해 정의회의 양해를 구하는 결의안이 상정돼 있었다. 그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직후였다.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긴 지진이 시작됐다. 이어 쓰나미 경보가 울렸다"고 말했다. 설마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 해안가에 자리한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부팅을 기다리면서 창밖의 바다를 보니, 상황이 심상치 않았다. 그는 곧바로 집을 빠져 나와 고지대로 몸을 피했다. "쓰나미(지진해일)로 집이 휩쓸려갔다. 집에 그냥 있었으면 나는 죽었을 것이다."

'핵발전소는 괜찮을까.' 쓰나미가 지나간 뒤 마쓰모토는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에 빠졌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3월13일 새벽 2시께 도쿄전력에서 정사무소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제1원전 원자로 1호기에선 쓰나미가 덮친 3월11일 자정께부터 노심 용융(멜트다운)이 시작돼 이튿날인 12일 오후 3시36분 수소폭발을 일으킨 상황이었다. 마쓰모토는 "바람이 부는 방향(남쪽)인 이와키시 쪽으로 전 정민을 피난시켜야 한다"고 정장에게 건의했다. 이날 오전부터 나라하마치 주민 7500여 명은 이와키시의 14개 학교체육관에 수용됐다. 3년에 걸친 피난 생활의 시작이었다.

사고 당시 남동풍이 분 탓에 수소폭발로 흩어진 방사성물질은 핵발전소의 북서쪽인 나미에마치, 이타테무라 쪽으로 날아갔다. 그 덕에 나미에마치는 공간선량(특정 공간에서 공기에 흡수된 방사선량)이 높지 않은 지역에 속한다. 정장을 중심으로 한 마을 사람들은 올 4월께 귀환 여부를 결정할 예정이다. 그러나 불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마쓰모토는 “공간선량이 좀 떨어졌다고 귀환하는 게 옳은지, 후쿠시마 제2원전의 폐로는 어떻게 할지 앞으로 따져물어야 할 것이 많다”고 말했다.

주민들이 귀향을 망설이는 가장 큰 이유는 제염이다. 일본 환경성의 자료를 보면, 핵발전소 사고의 직접적 영향을 받은 주변 11개 시·정·촌(한국의 읍·면·동) 가운데 제염이 모두 끝난 곳은 다무라마치 한 곳에 불과하다. 그 뒤를 이어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자리한 오쿠마마치와 나라하마치 등의 제염이 80~90% 정도 끝난 상태고, 나미에마치 등은 아직 작업을 시작조차 못하고 있다.

'핵발전소는 괜찮을까.' 쓰나미가 지나간 뒤
마쓰모토는 설명하기 힘든 불안감에 빠졌다.
우려는 현실이 됐다.
3월13일 새벽 2시께 도쿄전력에서
정사무소로 "핵발전소가 위험하다"는
연락을 해왔기 때문이다.
후쿠시마 상황에 무심한 서일본 사람들

지난 2월12일 교토에서 만난 사토 노리코(가명)도 사고 뒤 고향인 후쿠시마로 돌아가지 못한 주민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는 비가 내리던 2011년 4월19일, 11살 난 딸아이를 데리고 고속버스에 몸을 실었다. 서쪽으로 580km, 11시간을 내달려 오사카에 도착했다. 머물 집은커녕 지인 하나 없는 낯선 땅이었다. 불안이 덮친 고향과 달리 오사카 시내는 평온했다. 그를 포함한 후쿠시마 주민 900여 명은 교토부에서 내준 공영주택 등에 자리잡았다. 나고 자란 곳은 후쿠시마현 현청 소재지인 후쿠시마시. 집에서 60km 떨어진 곳에 사고가 난 후쿠시마 제1원전이 있었다. 멀다면 멀고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다. 눈에 보이지 않았기에, 핵발전소는 그의 삶과 동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쓰나미가 동일본을 강타한 3년 전 그날, 사토의 집도 어둠에 잠겼다. 전기·가스·수도 공급이 끊긴 것이다. 사흘이 지나서야 전기가 들어왔다. TV를 켜자 제1원전의 처참한 모습이 나타났다. “외출하고 집에 돌아오면 입었던 옷은 버리거나 세탁하고, 샤워를 해야 한다.” 언론은 이렇게 당부했다.

난방용 등유를 받기 위해 밖으로 나가야 했지만, 물이 나오지 않는 상황이었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정부도 지자체도 알려주지 않았다. 기댈 언덕이 없었다. 사고 나흘 뒤, 후쿠시마시 방사능 수치가 24.24μSv로 치솟았다. 평소보다 600배 높은 수치였다.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수치를 봐도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다. 인터넷에서 정보를 뒤졌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고 초기, 집 붕괴 같은 물리적 피해가 없었던 사토는 이재민으로 분류되지 않았다. 후쿠시마와 멀리 떨어진 오사카나 교토부에선 이재민 증명이 없는 후쿠시마 사람들에게 집을 지원해주었다.

정부는 사고 핵발전소 반경 20km 바깥은 안전하다고 했다. 딸아이는 낯선 곳으로 떠나지 않겠다고 고집했다. 친·인척과 친구들은 대부분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 예민하게 군다’는 시선도 있었다. 피폭에 불안한 마음이 있더라도 뿌리내리고 살아온 삶의 터전을 옮기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재취업이 어려운 건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토는 현재 일자리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자녀만 국외로 유학 보내거나, 가장만 후쿠시마에 남고 나머지 가족은 거주지를 옮기는 세대도 있다. 고향에 있는 친구에게 안부를 묻자, 전자우편 답장엔 이러한 문장이 있었다. “어차피 국외로 가는 게 아니면 똑같다.” 떠난 자와 남은 자, 마음의 거리도 멀어져갔다.

번호 지역 택지 농지
1다무라마치100%100%
2가와우치무라100%98%
3오쿠마마치84%37%
4나라하마치94%94%
5가와마타마치17%4%
6가쓰라오무라59%0.1%
7이타테무라9%4%
8미나미소마시0%0.1%
9나미에마치0%0%
10도미오카마치0%0.2%
11후타바마치계획미작성계획미작성

서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후쿠시마의 상황에 무심하다. 동일본에 살던 사토도 1995년 서일본을 강타한 한신 대지진 뉴스를 보며 ‘내 일이 아니다’라고 생각했다. 피난민이 되자 고립감이 엄습해왔다. 사고 두 달 뒤 ‘탈원전’을 외치는 시위에 나섰다. 난생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왜 도쿄 밥보다 오사카 밥이 맛있는지 아십니까. 도쿄 사람들은 ‘아줌마, 여기 밥이 맛없어요’라고 대놓고 말하지 못하지만 오사카 사람들은 말을 합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맛있게 만들고 싶지 않겠습니까? 그러니까 바깥으로 말을 하는 게 중요합니다.” 마이크를 든 누군가가 말했다.

비산하는 방사성물질 뒤집어쓴 소들

그날 이후 사토는 말하기 시작했다. 2012년 교토시장 선거에 ‘탈원전’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나타나자, 지원 유세에 나섰다. 시민운동 현장에 나가 경험담을 나눴다. 뜻이 맞는 피난민 주부 2명과 함께 ‘피난자 지원법을 생각하는 모임’을 결성하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쉽게 변하지 않았다. 지난 2월 도쿄도지사 선거에 나선 ‘탈원전’ 후보들은 선택받지 못했다. “이야기하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사람들이 그저 듣기만 하는 게 아닐까.” 사토는 잠시 말하기를 멈췄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 중이다.

사실 피난민 가운데 탈원전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는 소수다. 가까이 사는 피난민 가운데는 사토에게 “정치적 활동을 자제해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도 있다. 남들에게 후쿠시마 피난민으로 인식되는 게 싫다거나, 눈에 띄고 싶지 않다는 의미였다.

조만간 말하는 일조차 어려워질지 모른다. 최근 홈페이지에 올린 링크 주소 몇 개를 지웠다. 올해 말 시행을 앞둔 ‘특정비밀보호법’ 때문이다. 행정기관은 국가 안보에 지장을 줄 수 있는 정보를 ‘비밀’로 지정한다. 이런 ‘비밀’을 누설하거나 선동한 사람을 처벌할 수 있는 ‘위험한 법’이다. 정권의 눈에 거슬리는 정보를 비밀로 지정한다면, 이를 거론하고 비판할 자유를 억압할 수 있다. 쉬쉬하는 핵발전소 정보가 세상 밖으로 나오긴 더욱 어렵게 됐다.

3월6일 오전, 후쿠시마현 북동쪽에 자리한 미나미소마시에서 출발한 자동차는 국도 6호선을 따라 남하를 시작했다. 이 길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 후쿠시마 제1원전에 가닿는다. 도로 양옆으로 뒤집어진 자동차와 배 따위가 방치돼 3년 전 쓰나미의 위력을 전해주고 있었다. 핵발전소를 10여km 앞두고 취재진의 차량은 “더 이상 진입할 수 없다”는 안내원의 지시를 받고 그 자리에 멈춰서야 했다.

이곳에는 피폭을 감수하며 고향을 떠나지 않는 주민이 있다. 나미에마치에 자리한 ‘희망의 목장 후쿠시마’를 지키고 있는 요시자와 마사미(60)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를 키우는 사람이다. 소를 버리고 떠날 순 없다.” 이제 막 봄이 다가온 목장의 너른 구릉에는 조금씩 풀이 돋아나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땅으로 선량계를 갖다대자 수치가 금방 6~7μSv까지 뛰어올랐다. 방사성 물질이 쌓여 사람이 살 수 없는 죽은 땅이 된 것이다. 목장에서 핵발전소까지의 거리는 14km. 핵발전소에서 20km 안쪽 지역에 피난 지시가 내려졌으니 그는 원칙적으로 농장에서 살면 안 된다.

방사선은 사람과 소를
차별하지 않는지 그의 팔에도
원인 모를 하얀 반점이 돋아 있었다.
그는 “우리 지역은 버려진 지역이고,
우리 피난민들은 ‘버림받은 주민’
(棄民·기민)이다.

현재 그가 돌보고 있는 소는 350마리다. 요시자와는 “사고 직후 피난을 떠났다가 소들이 불쌍해 하루 종일 울었다”고 말했다. 인간과 달리 피난을 갈 수 없었던 소들은 비산하는 방사성물질의 공격을 속수무책 으로 받아야 했다. 이곳에서 보호받고 있는 소의 혈액과 근육에선 세슘이 검출된다.

100베크렐(Bq) 이상의 방사성물질이 검출되는 고기는 유통할 수 없다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 따라 소들은 모두 살처분돼야 한다. 요시자와는 “정부는 방사능 소는 귀찮은 존재이기 때문에 모두 죽이라고 한다. 나는 그럴 수 없다. 소들이 수명을 다할 때까지 살리겠다”고 말했다.

팔뚝엔 원인 모를 하얀 반점이

최근엔 강한 방사선을 받아 유전자가 변형된 탓인지 피부에 하얀색 반점과 털이 돋아난 소가 발견되고 있다. 그것도 벌써 10여 마리나 된다. 현지 조사를 나온 일본 농수산성 관계자는 요시자와에게 “정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고만 말했다. 방사선은 사람과 소를 차별하지 않는지 그의 팔에도 원인 모를 하얀 반점이 돋아 있었다. 그는 “우리 지역은 버려진 지역이고, 우리 피난민들은 ‘버림받은 주민’(棄民·기민)이다.

소들을 후쿠시마 핵발전소의 참상을 보여주는 증거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래도 소들의 생명력은 끈질겨 3년 사이에 200마리가 영양실조와 스트레스 등으로 죽고 200마리가 다시 태어났다. 요시자와의 설명을 듣다보니 소가 사람인지, 사람이 소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사람이 떠난 나미에마치의 거리엔 정적만이 흘렀다. 시간이 멈춘 듯한 거리에서 방치된 식당의 네온사인 간판과 신호등만이 하릴없이 깜빡이고 있었다. 건물의 도난을 막기 위해 순찰을 돌던 경찰이 “주민이 아니면 밖으로 나가달라”고 말했다. 후쿠시마현에서 고향을 떠나 피난 생활을 하고 있는 이는 모두 13만5546명에 이른다. 봄이 왔는데 하늘에선 진눈깨비가 내렸다.

우려한 대로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생기는
재앙이 벌어졌지만,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상
원자로를 설계한 GE는
사고 책임을 지지 않았다.
참고문헌 <그리고 또 다시 움직이다-후쿠시마 원전 사태 자주피난자와의 인터뷰>(전은휘•2012)

핵 사고 책임,
제조사는 몰라

일본 후쿠시마 사고를 통해 드러난 원자로 제조업체의 ‘면책특권’···
국내도 크게 다르지 않아

“원자로 제조사 쪽은 미필적 고의를 제외한 모든 경우에 대해 면죄를 받길 원합니다. 이와 관련한 문제점은 운영자·보험회사·정부가 함께 풀어나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핵발전소 운영자는 제조사의 기술을 믿고서 원자로를 건설합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조사들은 책임으로부터 면죄를 받게 되는군요.”(1959년 일본 원자력손해배상전문가그룹 회의록 중)

설계 결함 마크-1, 전세계 32기 운행

분명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워졌다. 1960년대 아시아 핵발전의 선두주자였던 일본 핵발전소는 미국에서 만든 원자로로 채워졌다. 1967년 첫 가동을 시작한 후쿠시마 제1원전에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이 설계한 비등형 경수로 최초 모델 ‘마크(Mark)-1’형이 들어섰다. 그러나 이 원자로는 안전하지도, 완벽하지도 않았다. 핵발전소 건설이 진행되던 1970년대 원자로 압력용기가 고압에 견디지 못하고 균열을 일으켜 방사능을 대규모로 유출할 수 있다는 지적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일본 핵발전소 건설 담당자들은 GE 쪽에 설계상의 문제를 지적했지만 별다른 조치는 이뤄지지 않았다. 지금도 마크-1형은 후쿠시마 핵발전소 1~5호기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32기가 운행되고 있다.

그렇게 30년 가까이 버텨온 후쿠시마 제1원전은 2011년 3월11일 쓰나미를 맞았다. 우려한 대로 제어 불능 상태에 빠진 핵발전소에서 방사능이 유출됐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생기는 재앙이 벌어졌지만,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상 원자로를 설계한 GE는 사고 책임을 짓지 않았다. 그린피스 일본사무소는 지난 2월21일 이러한 내용을 담은 ‘원자력발전 업계의 책임 회피 실태 고발’(Running from Responsibility) 보고서를 공개했다.

보고서는 “일본 정부에 정보공개 청구를 제기해 얻은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문서를 보면, 당시 GE 등 미국 원자로 제조사가 일본 정부의 원자력배상 관련법 초안 작성에 참여해 제조사의 책임을 지지 않도록 로비했다”고 주장했다. 1959년 12월12일 작성된 일본 원자력손해배상 전문가그룹 보고서에는 “핵발전소 제조사에 대한 배상상환권과 관련해서 해당 업체는 미필적 고의와 중과실의 경우 상환권 대상이 될 수 있다고 기록됐다. 그러나 핵발전소 제조사들의 우려를 막기 위해 ‘중과실’이란 표현은 삭제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히고 있다. GE의 ‘면책특권’은 여기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러나 최근 일본에서는 핵발전소 제조사의 ‘면책특권’에 문제를 제기하는 움직임이 벌어지고 있다. 지난 1월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피해자 1400여 명은 원자로 제조사인 GE 등을 상대로 원자로 노심 용융(멜트다운)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금전적 배상을 요구하는 집단소송을 도쿄지방법원에 냈기 때문이다. 원자로 제조사의 책임을 면제해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일본의 원자력손해배상법의 합헌 여부에 대해 판결을 받아 오래전 잘못 끼워둔 단추를 바로잡겠다는 것이다.

핵발전소 건설업체 사고 책임 더는 CSC

핵발전소 사고로 벌어지는 배상 문제는 국내법 안에서만 그치는 건 아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를 계기로 활발해지고 있는 국제적인 배상 조약도 문제다. 핵연료 관련 사고에 대비한 국제적 조약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1960년대 유럽경제협력기구(OEEC·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전신)의 후원으로 서유럽 회원국은 ‘파리조약’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비서구 회원국이 중심이 된 ‘빈협약’이 대표적이다. 이들 협약의 뼈대는 해당 국가의 핵시설에서 사고가 나면 해당 국가가 각종 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1986년 소련 체르노빌 핵발전소 사고가 터지고 주변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하자, 구체적인 배상 절차 등을 정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1997년 빈협정을 확대해 만든 ‘원자력 손해배상조약’(CSC)이 바로 그것이다.

CSC는 핵발전 가동 규모에 따라 회원국들이 공동기금을 운영하고, 사고 발생국에 지원을 해주는 방식이다. 현재 미국·루마니아·모로코·아르헨티나가 비준을 완료한 상태다. 보고서는 “CSC는 책임 배상액의 상한선을 정하고 책임 당사자 및 국가의 부담 비용을 최소화하려 한다. 또 거의 모든 핵발전소 사고에 대한 핵발전소 제조사의 책임 의무를 면제해주기 위해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날 경우, CSC 기금을 받기 위해 정부나 피해자가 제기할 수 있는 천문학적인 피해 보상 절차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CSC의 확대는 핵발전 선진국들에 ‘도덕적 해이’를 불러올 수 있다는 문제도 있다. 과거 미국이 일본 등에 핵발전을 수출하면서 종용했던 ‘면책특권’을 다른 나라가 같은 방식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핵발전 재가동을 선언한 일본 아베 신조 내각은 2012년 CSC 가입 의사를 밝혔다. 이는 히타치·도시바 등 핵발전 수출업체를 가진 일본이 미국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핵발전소 수출을 진행하면서 사고에 대한 책임을 덜기 위한 포석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일본의 가입을 계기로 핵발전 수출에 적극적인 우리 정부도 CSC 참여 여부를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핵발전 제조사들이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는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국내 원자력손해배상법에서는 핵발전 사업자인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이 극히 일부분만 사고 책임을 지고, 설계를 담당한 한국전력기술과 핵발전소에 주요 설비를 공급하는 두산중공업 등 관련 업체와 주요 건설사는 사고 책임과 상관이 없다. 이 때문에 핵발전소 사고 배상금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는 것이다. 최근 한수원이 지난해 이어진 원전 비리 사건과 관련해 가짜 케이블을 납품한 LS그룹 쪽을 상대로 1300억원을 물어내라는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바 있지만, 대규모 핵발전소 사고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도쿄전력 사고 부담금 약 60조원

현재 도쿄전력이 부담하게 될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부담금은 약 60조원 규모로 짐작되고 있다. 그동안 방사능 방재 등에 쓰인 25조원 등도 도쿄전력의 주식을 팔아 충당하기로 했다.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벌어지고 있는 배상 논란은 자동차 급발진 사고로 얼마나 큰 피해가 났는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 더욱 비싼 자동차보험을 찾는 모습을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