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한다는데, 언젠간 멈추겠지, 설마 죽일까…
그렇게만 생각했다.
조금 더 깊이 그녀의 울부짖음을 들었다면,
그녀는 여전히 우리 곁에 있을까.
스토킹은 사랑이 아니다.
스토커의 집착은
피해자를 조종하고 통제하고 지배하기 위함이다.
스토커가 특별한 사람도 아니다.
평범하게 친절하고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여기 집착과 소유욕, 폭력에 사라져 간
여성 3명의 이야기가 있다.
돌아서 우리를 보고 있는 그녀에게
이제는 좀 더 빨리 손을 내밀어야 한다.
“내 딸은 갔지만, 다음 죽음은 막고 싶다”는
한 아버지의 소망은 이뤄질 수 있을까.
2017년 11월20일 서울.
대학생 윤민정(가명·당시 24)은 졸업 전시회 준비로 분주했다.
전화벨이 울리자 윤민정은 ‘내일 전시회 보러 부산에서 올라온다던 부모님과 동생 전화겠지?’ 생각했다.
반갑게 받은 전화는 그러나, 윤민정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동생 민희(가명·당시 22)가 실종됐다고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민희는 가해자의 원룸에서 목이 졸려 숨진 채 발견됐다.
가해자는 자살했다.
엄마와 나는 가해자를 알고 있었다.
4수를 하고 지난해 대학에 들어간 동생이 재수학원에 다닐 때 잠깐 만난 남자다.
이름은 최현승(가명·37).
제대로 사귄 것도 아니었는데 남자는 이후에도 동생을 사랑한다며 쫓아다녔다.
그런데 37살이라니….
동생은 나한테 분명히 최현승과 동갑이라고 말했었다.
나이만이 아니었다. 집이 잘산다는 말도, 누나가 있다는 말도 모두 거짓이었다.
동생의 물건을 수습하러 간 최현승의 원룸은 허름하고 어지러웠다.
‘이 더러운 공간에 동생의 물건을 하나도 남기고 싶지 않아’ 나는 생각했다.
덩그러니 놓인 동생의 가방에는
<좋은 교사 되기>
란 책이 담겨 있었다.
동생의 꿈은 선생님이었다.
최현승의 가장 큰 거짓말은 따로 있었다.
‘죽을병’에 걸려 두 달 뒤에 죽는다고 했었다.
최현승을 만나주지 않던 동생은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최현승을 다시 만났다.
동생은 그를 “불쌍하다”고 했다. 그를 위해 울기도 했다.
헤어진 뒤에도 몇 년씩 자신을 좋아한다며 매달리는 최현승을 두고 마음을 받아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했다.
최현승은 ‘난 어차피 오래 못 산다. 몇 달만 니가 참아줘’라고 했다.
철저하게 동생의 동정심을 이용했다.
사건 한 달 전 마지막으로 동생을 봤을 때 동생을 한 번 호되게 몰아붙였다.
“아직도 걔를 만나주니?” 동생은 아니라고 했다.
분명히 “연락 안 한 지 몇 달 됐다”고 했다.
하지만 착하고 다정했던 동생은 최현승이 병을 핑계로 울면서 ‘한 번만 마지막으로 만나달라’는 말을 내치지 못했다.
그리고 11월19일, 집을 나섰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민희는 대학에 들어가서야 제대로 된 남자친구를 사귀었다.
처음으로 부모님한테 남자친구를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남자친구와 갑자기 헤어지게 됐다.
누군가 자신에게 익명 카톡을 보내 “네 남친은 전 여친을 낙태시키고 성매매를 했다”고 알려왔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동생이 최현승에게 상담을 한 모양이다.
최현승은 동생에게 “그런 쓰레기랑 만나면 안 된다”고 했다.
메시지의 발신자가 누군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 무렵, 동생은 카톡으로 “좋아하는 사람은 핵쓰레기였고, 지금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 정 때문에 같이 밥 먹어주고 있다”고 했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은 최현승이었다.
동생은 “뻥인 줄 알았는데 진짜 아파”라며
‘어차피 조금 있으면 죽을 사람이니까 잘 도닥여주기만 하면 된다’고 했다.
나는 “그런 애들 잘못 받아주면 칼 맞는다”고 말했지만,
솔직히 내 동생 좋다고 따라다닌 남자인데 설마 죽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동생 이야기를 듣고 “잘해주는 게 나을 것 같기도 하고. 불쌍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동생이 스트레스를 받는 건 알았지만, 나도 그땐 그렇게 생각한 것 같다.
‘죽는다는데, 사귀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밥 한 끼 먹어달라는 거잖아.’
나라고 거절을 할 수 있었을까.
그날, 최현승의 집으로 들어서는 시시티브이에서 동생은 웃고 있었다.
동생은 그 순간에도 설마 최현승이 자신에게 해를 가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동생은 무방비였다.
최현승은 평소 한 번도 동생을 협박하거나 때리거나 폭력적인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집으로 종종 보내던 편지에는 “네가 잘 되길 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언젠가 최현승을 만나러 가는 동생을 향해 “잘 다녀오라”고 한 적이 있다.
엄마는 ‘죽을병’에 걸린 최현승이 불쌍하니 밥 사 먹이라며 동생에게 돈을 쥐여주기도 했다.
그러니까, 엄마도 나도 동생처럼 무방비였다.
나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 건 최현승의 방에서 발견한, 최현승이 쓴 편지였다.
책에 휘갈긴 편지에는
“민희를 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사랑하는 민희를 위해 살을 빼야겠다”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사랑, 한다고?
동생은 최현승이 따라다니는 것이
부담스럽고 스트레스라고 하면서도 끝까지 최현승을 “착하다”고 했다.
차라리 때리기라도 했다면
최현승한테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텐데.
112 신고? 동생이 맞거나 폭력적인 언사를 당한 것도 아닌데 아예 생각지도 못했다.
맞은 사람을 신고해도 제대로 받아주지 않는 경우도 많은데….
우리는 누구도 “착하다”던 최현승이 돌변하리라 예상하지 못했다.
동생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가 없었다.
계속해서 기사를 검색했다. 정말 내 동생이 맞을까, 하는 생각에.
내가 동생의 주검을 보고 동생의 죽음을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에 기사가 이미 나왔으니까.
기사를 보니, 동생은 끝이 아니었다.
다음날엔 남편이 아내를 죽이고, 그 다음날엔 남자친구가 여자친구를 죽였다.
동생을 잃고서야 비로소 두 눈에 그런 사건들이 보였다.
최현승이 마지막까지 동생을 ‘사랑한다’고 했던 것처럼,
이들도 경찰 수사에서, 그리고 법정에서 “나는 내가 죽인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여성을 혐오하는 남자보다 여성을 사랑하는 남자가 더 많이 죽이는 현실.
그게 사랑일까, 나는 생각했다.
졸업 전시회를 다시 꾸렸다.
제목은
<사랑의 이름>
.
기간을 최근 1~2년으로 설정하고 ‘남자친구 살해’라는 검색어를 넣자 기사 수십 건이 주르륵 나왔다.
예쁜 편지지를 펼쳐 끔찍한 사건들을 직접 손으로 쓰기 시작했다.
편지 겉봉투에는 최현승이 동생에게 했던 말처럼 사랑을 속삭이는 말을 썼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어, 아 참 그게 너야!’
전시회를 열었지만 막상 나는 가지 못했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전시회가 열린 12월27일, 동생이 죽은 지 한 달 하고 일주일이 지난 날이었다.
동생이 미국에 교환학생으로 가기 위해 출국하려고 했던 날이기도 했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최현승은 살인으로, 가질 수 없었던 내 동생을 가지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역겹고 끔찍하다.
동생의 죽음을 다룬 기사들은 동생과 최현승의 나이 차를 강조하거나 심지어 ‘동반자살’ 운운했다.
왜 동생이 죽어야 했는지보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한 말초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기사들뿐이었다.
더 마음 아팠던 건 기사에 붙은 댓글이었다.
“꽃뱀 아니냐”, “남자가 다 해주고 나니 튀려고 하니까 그렇지.” 악플이라고 치부하려 해도 그런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내 동생에게만 그런 댓글이 달리는 것도 아니었다.
동생이 죽고 나서야 나는 스토킹 범죄가 똑같은 얼굴을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됐다.
평소에 폭력적인 성향이 드러나지 않아도 위험할 수 있고, 일방적인 구애 역시 위험한 스토킹이라는 것을.
그런데 여성 스스로도 잘못된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남자들은 더더욱 모르고.
최현승이 동생에게 그랬던 것처럼 동정심과 죄책감을 유발시켜 관계를 끊지 못하게 하는 이들도 많다.
사람들은 흔히 여성을 꾸짖듯이 이야기한다.
‘폭력적인 성향을 조금이라도 보이면 헤어져. 네가 보는 눈이 없다’고.
하지만 데이트폭력 가해자들은 그런 성향을 보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평소에 매우 친절한 경우도 있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건가. 왜 여자들이 일일이 조심하고 도망가야 할까.
근본적으로는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동등하게 대하지 않는 사회 인식이 문제다.
만약 피해자를 좋아하고 평소 폭력적이지 않은 남자도 어느 날 갑자기 죽일 수 있다는 걸 알았다면, 나 역시 최현승을 절대 못 만나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이건 후회 속에서 다짐하는 가정일 뿐이다.
변화는 언제쯤 찾아올 수 있을까.
나부터라도 목소리를 높여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다.
나에게서 동생을 뺏어간 그 남자를 생각하면, 살렸다 죽이고 다시 살렸다 죽이고 싶은 심정이다.
하지만 차라리 자살한 게 다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전 여자친구를 죽여도 10년, 아예 집행유예로 나오는 게 현실이니까.
가정이지만, 최현승이 우리 집 위치도 아는데 감옥에서 언젠가 나올 것이라 생각하면 소름이 돋는다.
이제 동생도, 최현승도 없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만 남았다.
아직 해지하지 않은 동생 휴대전화는 끝내 복구에 실패했다.
기기 특성 탓이라고 했다.
가끔 무신경하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였다.
그런 아버지가 오늘도 동생 친구들을 만나러 다닌다.
동생의 흔적을 찾기 위해.
그리고 이제 아버지는 하루에 두 번 내게 전화한다.
나의 생존을 확인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