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이가 죽었다
2013년 2월12일 낮, 한 소도시의 병원 응급실에 트럭 한 대가 들어왔다.
남녀 한 쌍이 내렸다.
남자의 손에 축 늘어진 아이가 들려 있었다.
13살 민이(가명)였다.
남자의 딸인 민이는 그해 설을 이틀 앞둔 2월8일 구토를 하며 음식물을 토하고 죽었다.
민이는 죽기까지 약 4600일을 살았다.
그동안 자란 키가 109㎝였고, 몸무게는 7.5㎏이었다. 또래 아이들(12~13살)의 평균 키·몸무게인 152㎝, 43㎏과는 차이가 크게 났다.
민이 사체를 본 경찰은 "마치 미라와 같았다" 고 말했다.
부부는 민이가 죽은 지 나흘 만에 병원을 찾았다.
나흘 동안 몸의 수분 등이 증발한 점을 감안하면 아이의 몸무게는 죽기 직전 8~9㎏ 안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의사는 아이의 맥박과 동공 등을 확인하고 사망을 확정했다. 다분히 형식적인 절차였다. 의사는 사체검안서를 쓰고 곧 경찰에 신고했다.
민이가 집 안에 갇혀 지낸 지 9년만에 사회와 만나는 순간이었다.
우울한 엄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엄마는 민이가 미웠다.
25살, 결혼 4년만에 얻은 첫 아이였지만, 양육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준비하지 않은 채 맞은 아이는 엄마에게 기쁨이 아닌 스트레스였다. 남편은 물론 시댁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둘째 현이(가명)가 태어난 뒤, 엄마의 관심은 민이로부터 더욱 멀어졌다.
“아내가 민이에게 별로 정이 없었다.” 아빠의 증언이다.
민이는 점점 말을 듣지 않고 짜증이 많은 아이가 되었다.
가정 불화에 경제적 곤란이 겹쳤다.
아빠가 사업에 실패하고 빚쟁이에 쫓기는 신세가 됐다.
가족이 한 곳에 머물러 살 수 없게 됐다. 잦은 이사 탓에 2006년 주민등록이 말소됐다. 가족·친지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아이는 물론 엄마도 집 밖 출입을 하지 않았다.
엄마에게 우울증과 불면증이 찾아왔다.
대인기피증도 생겼다. 아빠는 빚쟁이를 피해 멀리서 일했고, 한 달에 두 세번 정도만 집을 찾았다.
빈곤은 다시 불화를 키웠고, 민이네 가족은 사회적으로 완벽히 고립됐다.
4살, 누워있는 아이가 되다
2004년 2월 어느 날, 네 살 민이가 울었다.
울며 보채는 아이를 어쩌지 못하다, 엄마가 막대기로 아이를 때렸다.
아이의 넓적다리뼈가 부러졌다.
폭행이었다.
엄마는 10년 뒤 경찰 조사에서 “아이가 넘어져 다리 뼈가 부러졌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 살 아이가 넘어져서는 생기기 힘든 부상이었다. 경찰 조사가 계속되자 엄마는 본인이 민이를 때렸다는 것을 털어놓았다.
민이는 방 한 편에 누워 지냈다.
깁스를 푼 민이가 겁을 먹고 걷지 않으려 한다는 이유로 걷기 연습도 시키지 않았다. 말도 걸지 않았다.
오랫동안 누워만 있던 민이는 어느 순간 그저 ‘누워있는 아이’가 되었다.
남편은 오랜만에 집에 찾아와, 말없이 민이를 바라볼 뿐이었다.
민이가 다쳐서 움직이지 못했지만 부부는 민이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았다.
돈도, 의지도 없었다. 아빠는 “나중에 살림이 나아지면 치료하려고 했었다”고 했다. 그러나 상황이 좋아진 뒤에도 민이는 치료받지 못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되거나 장애 아동으로 신고해 치료를 받도록 할 수 있었지만 부부는 그조차도 하지 않았다.
민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꿈을 꿨는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바랐는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어둠 속의 9년
2013년 2월 경찰 조사가 시작됐다.
충격적인 사실이 드러났다.
민이는 9년 동안 방에서 누워 지냈다.
적절한 영양분을 공급받지 못해 몸무게는 채 10㎏이 되지 않았다.
키도, 민이가 폭행 당한 시절인 5살 수준(109㎝)에 머물렀다.
죽기 직전 민이는 걸을 수 없었고, 말을 할 수도 없었다.
엄마는 죽지 않을 정도로만 민이를 돌봤다.
민이 사망 사건을 다룬 판결문에는 “1일 1회도 식사를 제공하지 않는 날이 있는 등 충분한 영양을 공급하지 않았고, 1년에 1회 정도 목욕과 양치질을 시키는 등 피해자를 방치했다”고 돼 있다.
민이의 공식 사망 원인은 영양결핍 또는 영양불균형 및 탈수였다.
사망 시간은 2013년 2월8일 오후 4시에서 오후 10시 사이였다.
신체 학대에 이은 치명적 방임이 이뤄졌다.
민이 사체를 부검한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점, 변사자가 식사를 잘 못 하였음에도 이에 대한 건강관리를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골절 치료 후 재활치료를 권유받았음에도 받지 않았고 누워지내게 했던 것으로 보이는 점 등을 참고하였을 때, 소아방치(child neglect; 소아에게 음식과 물, 주거지, 건강관리, 교육, 정서적 지지 등이 제공되지 못하는 경우)의 가능성이 배제되지 않는다”고 부검감정서를 썼다.
아동보호전문기관의 업무 수행지침서를 보면 방임은 ‘보호자가 아동에게 고의적 반복적으로 아동양육과 보호를 소홀히 함으로써 아동의 정상적인 발달을 저해하는 모든 행위’로 보고 있다.
아무도 몰랐다
경찰 조사가 진행되고 재판까지 받았지만 민이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가해자가 친부모이고, 이들이 사건의 공개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웃들은 민이의 죽음은 물론이고 민이의 존재조차 몰랐다.
민이가 살던 아파트 관리사무소의 한 직원은 ‘2년 여 전, 이곳에 살던 아이가 영양실조로 죽은 사실을 아느냐’는 질문에 “전혀 몰랐다. 이 아파트는 단지가 작아 웬만한 사실은 금방 소문나는데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고 했다. 이 아파트에 전세로 살았던 민이네 가족은, 아파트 거주인 명단에조차 자신들을 올리지 않았다.
가족이 스스로를 감추고 고립시키는 상황에서 민이를 구할 수 있는 기회는 사실상 없었다.
다만 국가가 그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회는 딱 한 차례 있었다.
2007년 민이가 만 7살이 되고 초등학교 입학을 위한 취학 통지서를 받을 때였다.
그러나 민이는 전년도에 주민등록이 말소돼 취학통지서를 받을 수 없었다.
민이처럼 거주지가 분명하지 않아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한 해 평균 1500여명에 이른다.
국가는 병역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청년은 경찰에 고발해 찾아 내지만, 취학통지서를 받지 못하는 아이들은 스스로 신고할 때까지 방치한다.
민이 동생 현이도 2013년까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현이 역시 방임으로 인한 학대를 당한 셈이다.
어렵게 살던 민이네 가족은 최근 아빠가 괜찮은 직장을 구하면서 사정이 나아졌다.
그러나 살림이 편 뒤에도 엄마·아빠는 민이를 치료하지 않았다.
부부를 변호한 변호사는 “그때는 이미 아이 상태가 어찌 할 수 없는 단계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냥 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한 달에 한 번 민이를 생각하다
엄마는 2013년 10월 유기치사죄로 4년형을 선고받고 현재 감옥에 있다.
아빠는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으나 3년간 집행을 유예받았다.
부부는 항소하려 했으나 포기했다.
민이의 죽음에 대한 죗값을 치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둘째 현이는 뒤늦게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곧바로 초등학교 고학년에 편입해 들어갔지만 엄마가 집에서 열심히 공부를 가르친 덕분에 성적은 뒤쳐지지 않고 있다. 현이는 여느 학생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모습이었다.
현이를 맡았던 담임 선생님은 “현이가 언니와 엄마 얘기를 하는 것을 원하지 않는 듯 해서, 물어보지 않았다”며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고 공부도 썩 잘 하고 있다”고 말했다.
아빠는 현이와 함께 부인이 석방되기를 기다리며 살고 있다.
“민이의 죽음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해요. 아내와 둘째에게도 늘 잊지 말라고 얘기합니다. 다만 아내가 아직 아파서 이겨내지 못하고 있어 걱정입니다.” 그와 기자의 만남은 지난달 2일 비오는 밤, 그의 집 앞에서 우연하게 이뤄졌다.
짧은 대화 끝에 긴 인터뷰를 제안했고, 긍정적인 답을 얻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그는 “아내와 둘째 딸이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아빠와 현이는 한 달에 한 번씩 엄마를 면회하러 교도소에 간다.
돌아오는 길에는 납골당에 있는 민이에게 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