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링크

철도원, 고양이를 부탁해

처음으로

“저기요~ 고양이 한마리가 피를 흘리고 있어요…”
몸 속 피까지 얼어붙을 것 같은, 1월 말의 매서운 추위였다. 한 고등학생이 떨리는 목소리로 천안시청에 전화를 했다. 앞발이 잘린 아기 고양이가 마트 주차장 벤치 위 상자 속에 담겨 있다는 것이었다. 이경미 천안시 유기동물보호소 소장은 마트로 뛰어갔다.

처음으로

피로 얼룩진 박스 속에, 기진한 주황색 아기고양이가 쓰러져 있었다. 차게 식은 우유 한접시와 빵조각이 함께 있었다. 불쌍히 여긴 사람들이 넣어준 것 같았다.

이 소장은 조심스럽게 고양이를 안아올렸다. 아기고양이는 다친 상태에서도 손길을 꺼리지 않았다. 사람의 손을 탔다는 얘기였다. 핑크색으로 말랑말랑한 발바닥을 보면, 길고양이는 아니었다.
병원에서 엑스레이를 찍어보니 왼편 앞발의 두 마디가 반듯하게 잘려 있었다.

처음으로

이 소장은 직감했다. 가위, 혹은 칼로 단번에 베어낸 상처였다. 쥐덫에 걸리거나, 차에 치일 때 생기는 으깨진 상처가 아니었다.

부상한 고양이들에게 최악의 사태는 패혈증이다. 앞발을 절단해야 할 수도 있다. 다행히도, 아기고양이의 상처는 한달 동안 천천히 아물었다. 애교가 많은 녀석이었다. 보호소에서도 줄곧 야옹거리며 사람에게 안겼다. 어느날, 상처가 덧날까봐 가둔 3단 케이지를 딛고 올라가 보일러 파이프 구멍을 통해 탈출했다. 놀란 이 소장이 찾으러 나가자 밖에서 한 팔을 들고 야옹거렸다. “나 여기 있어요. 나도 걸을 수 있잖아요.” 말하는 것 같았다. 고양이의 이름은 ‘샹크스’가 됐다. 만화 <원피스> 에서 왼팔이 없지만 불굴의 의지를 가진 캐릭터 이름을 땄다.

상처는 완벽하게 아물었고, 절뚝이긴 하지만 걸을 수 있게 됐다. 천운이었다. 하지만 이 소장은 애가 탔다. 보호소 블로그 등에 샹크스의 사연을 올리고 입양처를 찾았지만, 장애가 있는 고양이를 데려가겠다고 나서는 이가 없었다. 시 보호소에선 일정 기간이 지나도 주인을 찾지 못한 고양이나 강아지는 안락사된다.

처음으로

처음으로

휴가철 햇볕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달궈진 선로에서는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다음날은 중복이고, 토요일이었다. 들뜬 마음을 안고 길을 나선 가족들로 기차역이 아침부터 붐볐다.

다섯살 무렵쯤 되어 보이는 한 아이는 선로 옆 승강장에 쪼그리고 앉아 놀고 있었다. “삐익, 삐익” 김행균 당시 영등포역 열차운용팀장이 맞은편 승강장에서 호루라기를 불었다. “뒤로 물러서세요. 곧 열차가 들어옵니다.” 아이는 꼼짝하지 않았다. 재차 울린 호루라기 소리도, 고함도 소음에 묻혔다. 열차가 진입하면서 돌풍이 일면, 15킬로 남짓해 보이는 아이의 몸은 균형을 잃고 떨어질 것처럼 보였다.

저 멀리 열차가 보였다. 주저할 시간이 없었다. 선로로 뛰어내린 뒤 건너편으로 달려가, 아이를 밀쳐냈다. 부산행 새마을호 열차의 열기가 느껴졌다. 반대편 선로에 몸을 던지고 정신을 잃었다. 왼쪽 발목은 미처 빠져나오지 못했다.

접합 수술은 실패했다. 의족을 끼우려면 무릎 아래까지 절단해야 했다. 수술 실패는 예상치 못한 충격이었다..

사고 다음날인 2003년 7월26일 김행균 영등포역 열차운용팀장의 입원 모습. <연합뉴스> 사고 다음날인 2003년 7월26일 김행균 영등포역 열차운용팀장의 입원 모습. <연합뉴스>

'아이를 구하고 다친 의인' 언론은 떠들썩했지만, 아내와 두 아들, 어머니에게 한없이 죄스러운 날이 이어졌다. 두 형의 진학 뒤, 학비가 들지 않는 국립 철도고등학교를 선택했던 효자 막내였다. 늙으신 어머니가 펄럭이는 양복바지를 보면서 뒤돌아 흘릴 눈물이 그는 가슴아팠다.

처음으로

산동네엔 놀이터가 없었다. 학교 운동장에서 종일 공을 차다 지겨워지면, 놀이터가 있는 동네까지 갔다. 당인리 발전소로 가는 기찻길 옆이었다. 땡땡땡, 경고 차임벨 소리와 함께 열차가 우르릉 땅을 울리며 힘차게 달려오면, 소년의 가슴은 뛰었다. ‘언젠가는 저 열차를 운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소년의 꿈은 언제나 먼 길과 닿아 있었다. 시베리아 벌판을 횡단하는 열차 운전수도 되고 싶었고, 하얀 제복의 ‘마도로스’가 되어 세계의 항구를 탐험하고도 싶었다. 철도고 재학 시절 취미는 달리기였다. 신문배달 아르바이트를 할 땐 도화동에서 한강대교, 마포대교까지 예사로 달렸다. 때로는 성북구 월곡까지도 달려서 갔다. 두 다리는 기관차처럼 튼튼했다.

학비가 무료인 철도고는 졸업 뒤 철도청에 입사하지 않는 경우 학비지원금(60만원)을 토해내야 한다. 79년은 회사원 월급도 7~8만원이었던 시절, 대학에 가고 싶었던 친구들은 무리해서라도 거금을 마련했지만, 그는 미련 없이 입사를 선택했다.

토박이 서울내기는 처음으로 지선으로 뻗어나가는 간이역들을 만났다. 근무하는 직원 달랑 2명, 눈뜨고 보이는 건 매 푸르른 산뿐이던 중앙선 석불역(경기도 양평군이지만, 강원도에 가깝다. 지형상 기차역 외엔 교통수단이 미비해 ‘내륙의 섬’이라고도 불린다)에 발령받았을 시절엔 토끼도 키우고, 강아지도 키웠다. 토끼가 그렇게 새끼를 많이 낳는지 처음 알았다. 연애도 남쪽에서 했다. 하얀 얼굴이 예뻤던 안동 아가씨는, 10년만에 서울 발령을 받았을 땐 안동댁이 되어 함께 올라왔다. 경기도 부천과 서울 남부지역의 월세방과 전세를 전전하는 동안 두 아들은 쑥쑥 자랐다.

처음으로

아마 철도청 직원들의 봉사활동에서 찾았던 고아원이었던 것 같다. 2001년 간석역에 근무하던 시절, 운행하는 ‘밀레니엄 해맞이 관광열차’ 6량 중 1량엔 보육 시설 아이들을 데려가자고 제안했다. 철도청 직원들이 비용을 각출하고, 모자라는 돈은 당시 ‘중앙교회’의 목사님이 도와줬다. 처음 바다를 본 아이들의 환호성을 잊을 수 없다. 정동진 해돋이도 보고, 동굴도 보고, 태백선 눈썰매장도 갔다. “시설 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던 아이들 말에 뿌듯했다.

2003년 사고로 이 여행은 중단됐다.
김 역장은 5번이 넘는 수술을 받았다. 접합 수술 실패와 기나긴 재활치료는 긍정적인 그조차 우울하게 만들었다. 어느날 함께 열차 여행을 했던 아이들이 편지를 들고 병문안을 왔다. 또박또박 써내려간 편지글을 읽다, 눈물이 핑 돌았다.

 저는 해가 뜨는 것을 처음 봤습니다.저는 저 태양처럼 사람들에게꼭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역장님처럼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돼 다른 사람에게 좋은 추억을 선물해 주고 싶어요.

“빨리 일어나서 다시 아이들과 여행을 가고 싶었다.” 그는 다시 일어섰다.

처음으로

틈틈이 심장병 백혈병 어린이 돕기, 편모가정, 다문화가정, 장애인, 장기기증 운동 등 사회적 약자를 돕는 일에도 나섰다. 2007년 역장으로 승진한 뒤로는 생각해 왔던 ‘희망 열차’를 실행에 옮겼다. 2009년께 사스 때문에 무산된 적도 있고, 올해처럼 경기가 나빠 후원자를 찾지 못해 거르게도 됐지만, 지난 11년간 1600명이 넘는 아이들의 꿈을 싣고 달렸다. 첫 여행에서 아홉살이었던 꼬마들도 스무살이 될 정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아이들은 간혹 김 역장을 찾아온다. 얼마 전엔 막차 시간이 지나 한 아이가 찾아왔다. 가만히 물으니, 광명으로 가는 막차를 놓쳤다고 했다. 데리러 나올 부모님도 계시지 않고, 택시비 만원 한장도 손에 없었던 스무살 청년은 김 역장이 떠올랐지만, 목덜미만 붉힌 채 서 있었다. 그럴 땐 밤늦게도 찾아올 수 있는 전철역에 근무한단 사실이, 새삼 다행이다.

김행균 역장이 2007년 1월11일 새벽 인천과 부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을 찾아 해맞이를 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연합뉴스> 김행균 역장이 2007년 1월11일 새벽 인천과 부천 지역 청소년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해돋이 명소인 정동진을 찾아 해맞이를 하며 함성을 지르고 있다. <연합뉴스>

전철역에서 끼니가 어려운 사람들이 언제든지 쌀을 퍼갈 수 있게 해서 화제가 됐던 ‘사랑의 쌀독’도 김 역장의 아이디어였다. 5년 전, 역곡역을 순회하다가 지하철에서 폐지를 줍는 할머니를 알게 됐다. 자식이 있어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없지만, 자식들은 할머니를 부양할 처지가 아니었다. 사람들 눈을 피할 수 있는 대합실 한쪽에, 필요하면 가져가실 수 있게 쌀독을 놨다. 이후 서울메트로는 2009년 정식으로 당산역 등에 ‘사랑의 쌀독’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 관련기사: 나눔의 온정 넘치는 지하철 ‘사랑의 쌀독’ .

남을 돕는 일은 그 자신에게도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2006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멘토-멘티가 되어 킬리만자로를 등반하는 내용의 다큐멘터리를 찍으며 처음으로 국외에 나가 봤다. 아이들의 꿈을 이뤄줬으면서도, 머나먼 나라의 항구와 기차역들을 상상했던 자신의 꿈은 미처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흘러 간 세월이었다. 그래서 2007년 사이버대학교 중국통상학과(현 국제무역물류학과로 통합)에 입학했다. 언젠가 한반도의 철길이 중국을 넘어 러시아와 유럽까지 이어질 테고, 그렇다면 그쪽 공부를 해두면 철도 일에도 도움이 되겠다 생각했다. 누가 뭐래도 철도와는 떼어놓을 수 없는 운명이다.

2004년 10월 재활치료 모습 2004년 10월 재활치료 모습

사고 뒤 오히려 더 바쁜 남편 때문에 아내에겐 늘 미안하다. 남편이 돈만 벌어다 줄 게 아니라 사랑도 나눠주고 해야 한다는데, 아내에게 늘 혼나는 처지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표현이 잘 안된다. 아들 둘만 키우다 보니 더욱 속마음 드러낼 일이 많지 않았다. 올해 제대하고 인하대 공대로 복학한 큰아이와, 아주대 공대에 입학한 막내까지, 쇳소리 나는 ‘공대 사내’들만 가득한 집을 봄볕처럼 포근하게 감싸준 아내는 가장 고마운 사람이다. 어떻게든 시간을 짜내 둘만의 국외여행도 한번 떠나볼 작정이다.

☞ 김행균 역장이 아내에게 전하는 메시지

처음으로

이젠 사람 뿐 아니라, 동물권 보호 운동까지 한발 걸치게 된 때문이다. 지난 3월, 동물보호운동을 하는 철도고 후배가 다급한 목소리로 재차 청해왔다. 전부터 만나기만 하면 고양이 한마리 키워 보라고 조르던 후배 녀석이었다. “형, 큰일났어요. 얘는 이제 치료도 다 끝나가는데 입양을 보내지 못하면…” 한 발이 없어 입양처가 없는 고양이가 안락사를 코앞에 뒀다는 얘기에, 김 역장은 자신의 발끝을 한참 쳐다보았다.

처음으로
비디오 링크
Video

처음으로

바로 역곡역의 ‘마스코트’ 다행이다.
벌써 몇번이나 방송에 출연했다. 호기심에 찬 여중생들은 하교길에 똑똑, 역곡역 전철 사무실을 두드리고 고양이를 안아주고 간다. 민원 창구가 항의와 고성 대신 웃음소리로 가득해 진 지 벌써 반년째다.

인기 스타, 다행이는 이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눈을 번쩍 뜬다. 고객지원실로 김 역장이 들어섰다. 교대로 주야간 근무를 하는 김 역장이 야간근무를 하는 오후가 시작된 것이다. 모른 척 다시 어깨를 늘어뜨리고 눈을 꿈벅거렸지만, 수염엔 팽팽한 생기가 돌았다.

처음으로

"맛있는 간식을 주로 제가 주니까(웃음) 졸졸 쫓아다니고, 하루 이틀 안보면 반갑다고달려듭니다.” 옷매무새를 정리하는 김 역장의 발치를 어느샌가 몸을 일으킨 다행이가 스윽 부비더니, 소파에 앉아 다시 새침하게 고개를 꼰다. 제복 바짓자락에 노란 털이 한가닥 붙었다.

“직원들과 공익근무자에, 봉사하시는 어르신까지 하면 사무실 식구들이 20여명이 넘는데, (직원들을 보면) 이렇게 쳐다보고 ‘아, 나한테 간식 주는 사람이구나’ 알아보는 것 같아요. 사람을 보면 숨는 고양이도 있지만, 처음 와서부터 정에 굶주렸는지 부비고 잘 따랐어요. 아는 사람들에겐 장난치고 꼭꼭 물어주고 하는데, 처음 오는 분들 앞에선 이렇게 얌전을 떠네요.” 다행이는 코앞에 ENG카메라를 들이대도 ‘내가 카메라 체질이지’ 하듯 점잖게 고개를 빼든다.

동물이 ‘명예 역장’을 맡는 일은 다른 나라에도 있었다.
2007년 2월 일본 와카야마현 기노가와시 소재 기시역(와카야마 전철 기시가와선) 역장으로 임명된 고양이
타마. 국내 항공사의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지면서 인구 6만6000여명의 작은 마을 기노가와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다. 기노가와시 관광홍보물 갈무리 2007년 2월 일본 와카야마현 기노가와시 소재 기시역(와카야마 전철 기시가와선) 역장으로 임명된 고양이 타마. 국내 항공사의 광고에 등장할 정도로 유명해지면서 인구 6만6000여명의 작은 마을 기노가와를 찾는 관광객들이 크게 늘어났다. <기노가와시 관광홍보물 갈무리>

일본 와카야마 선 기시역에서 손님을 맞는 고양이 역장 ‘타마’는 지자체에서 ‘훈공작’ 칭호까지 받았다고 한다. “우리로 치면 문경 같은, 하루에 열차가 한두번 오가는 시골역이었나봐요. 폐선되다 보니 점점 직원들도 줄어들고, 그 와중에 마을 주민들이 키우던 고양이가 역에서 계속 있으니까 밥도 주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 역 역장이 되고 지역경제까지 살렸다는 훈훈한 이야기지요. 하지만 전철 수송량을 늘리려고 다행이를 데려온 것은 아니에요(웃음).”

처음으로

버림받고 상처받은 고양이 한 마리를 입양하는 일이지만, 공공서비스 종사자로서 약자에 대한 보호를 실천하는 것이라면 거리낄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 내의 민원실(고객지원실)은 아무래도 쉽게 사람들이 드나들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 다행이를 통해 이런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청소년들이나 직장인들도 부담 없이 찾아 오셔서 쉬다 갈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김 역장은 결국 직원들과 의논을 거쳐 다행이를 역곡역에 데려오기로 결심했다. 역사 사무실은 24시간 직원이 상주하기 때문에 몸이 편치 않은 고양이를 늘 지켜볼 수 있다. ‘다행이’라는 이름도 시민 공모를 통해 지었다.

회사(코레일)에서 꺼리면 어쩌나 염려했지만, 오히려 반대였다. 얘기를 들은 직장 상사가 “하루 이틀 키우고 말 것도 아닌데, 명예역장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 제안했다. 본부장은 직접 명예역장 위촉장까지 보내줬다. 취임식엔 시의원까지 찾아왔다.

염려를 불식시키듯, 다행이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지난 8월 ‘수도권 전철 40주년 기념 행사’를 치른 뒤엔 ‘다행이 스탬프’도 생겨났다. 원래 서울 각지의 전철역마다 특유의 도장을 찍어 모으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역곡역에선 ‘고양이 발 도장을 찍어주면 안되느냐’는 요구가 하도 많아서 행사가 끝난 뒤 별도로 스탬프를 제작했다. “고양이 발에 인주 칠하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거든요. 허허허…” 시민 이상호 씨가 직접 페이스북에 아이디어를 내고 역곡역을 찾아와 다행이 발 본을 떠 돌을 파서 직접 제작해 기부했다.

시민 참여로 만들어진 ‘다행이 동화책’도 배포된다. 다행이의 사연에 감동받은 미대생 박다미씨가 삽화를 그려 SNS에 올리기 시작했고, 그걸 본 사람들이 ‘책으로 만들어 지역 아동단체 등에 널리 보내자’며 자발적으로 성금을 모았다. 전국 각지의 학교와 유아교육시설에서 동화책을 보내달라고 신청한 곳만 300군데가 넘는다. 다행이는 캐롤송도 갖고 있다. ‘다행이도 크리스마스’는 지난 4월 다행이 사연에 감동을 받은 음악가 김영준 씨가 작곡해, 현재 음원사이트 등에서 들을 수 있다.

이런 유명세를 누구보다 가장 반기는 사람들은 의외로 ‘동장’들이란다. “이전에는 설명할 때 ‘역곡역이 어디 있어?’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금은 역곡역이라고 하면 바로 알아듣는다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구요(웃음).”

처음으로

역장님 의자를 태연하게 차지하고 앉은 다행이에게 쫓겨나 소파에서 업무를 봐야 할 때도 있지만, 손자를 본 할아버지처럼 ‘허허’ 웃음만 난다. 절뚝이면서도 창틀에 뛰어오르고 캣타워와 소파를 오르내리는 씩씩함도 정겹다. 다행이가 앉았다 갔는지 온기가 남은 의자에 앉을 땐 마음이 편안해진단다. 이러니 “역장님은 다행이 바라기”라고 봉사자들이 놀릴 정도다.

김 역장은 다행이를 구조한 유기동물보호소 및 자원활동가들과 대화하는 ‘다행이 카톡방’에 수시로 다행이 사진을 찍어 올린다. 도시락을 먹는 역장님 식탁 옆자리를 꿰차고 앉아 식탁에 놓인 열무김치를 ‘먹는 건가?’ 표정으로 호시탐탐 노리는 사진을 보곤 카톡방이 한동안 ‘ㅋㅋㅋㅋㅋㅋ’로 가득 찼다. 받아본 사진을 ‘다행이 팬페이지’를 운영하는 자원활동가가 페이스북에 올리면, 댓글창도 한동안 시민들의 웃음으로 가득해진다.

김 역장에게 가장 반가운 것은 다행이 덕분에 부담 없이 역사를 찾는 시민들이 늘었다는 거다. 특히 방황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을 쓰고 있는 김 역장으로선, 어린 학생들이 다행이의 재롱을 보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가 가장 흐뭇하다. “동물에게 사랑을 주면 주는 사람 마음까지 따뜻해지잖아요. 마음 둘 데 없는 아이들이 저녁 늦게 밖을 서성이는 대신 안전한 우리 역사를 찾아와 다행이랑 놀고 작은 위로를 받고 가면 좋겠어요.”

지금은 사무실이 철문이라 사람들이 쉽게 두드릴 맘을 먹기 어렵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곧 안을 들여다볼 수 있는 유리문 공사도 하려고 한다. “무더울 때는 찾아와 쉼터로도 이용하시고, 목마를 때 물도 축이시고, 다행이도 보고 웃음을 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다행이가 지키는 역곡역으로 놀러오세요!”

처음으로

동물보호법 15조는 각 시도지사가 유기된 동물의 보호를 위해 농림축산식품부령에 따라 유기동물보호센터 시설을 운영(위탁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다행이처럼 고양이가 ‘구조’되는 경우는, 유기견만큼 흔하지는 않다. 사람을 그리워하는 개는 주인 잃은 동물로 구조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지만, 고양이는 야생성이 있는 ‘길고양이’로 취급받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손을 탔다가 버려진 고양이일지라도, 구조의 손길이 미치지 못한 채 짧은 생을 길에서 마치기 십상이다.

다행이를 이어준 사람1 : 이경미 천안유기동물보호소장 “외국 품종 고양이만 구조받는 현실 아이러니” 겉보기에 한국재래종 고양이(‘코숏’)이면 길고양이로 간주해 구조 대상에서 제외되지만, 다행이는 코숏의 외모를 지녔음에도 흉기로 발이 잘린 흔적을 볼 때 학대당한 고양이로 분류됐다. “쥐덫 등에 걸리거나 문에 끼인 발은 으스러지지만, 이건 학대 아닐까(했어요). 고양이 같은 경우엔 학대묘가 많이 들어와요. 고양이에게 새총을 쏘는 사람들도 많고… 어떤 고양이는 눈이 빠진 채로 피시방에 뛰어들어왔다고 해서 구하러 간 적도 있어요.” 이경미 천안시유기동물보호소장은 “강아지의 경우 사람이 같이 논다고 던져서 골절되거나 뇌진탕이 오면 치료비가 많이 든다고 버리는 케이스가 많다면, 고양이는 대못을 총으로 쏘는 등의 학대를 당한다”고 설명했다.

“고양이는 외출 습성이 있어 주인분들이 ‘불쌍한 동물을 왜 가둬놓느냐’며 내놓고 기르시기도 하는데, 외출했다가 돌아가지 못한 고양이들은 길에서 1년 안에 목숨을 잃는다고 보시면 돼요.” 아마 다행이도 ‘외출 냥이’였다가 나쁜 사람을 만나 발이 잘리지 않았나 이 소장은 추측하고 있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성품이라서 변을 당하기도 쉬웠을 거다.

하지만 강아지도 아닌 고양이, 그것도 장애가 있는 고양이가 입양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래선지 이 소장은 유독 다행이에게 마음이 쓰였다. 어느날, 입양가는 고양이를 임시보호해 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김지영씨에게서 “역곡역의 역장이 되어줄 고양이가 있느냐? 장애가 있어서 입양이 힘든 아이여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 다행이를 적극 추천한 것도 그래서였다.
♣ 이경미 천안유기동물보호소장 인터뷰 이경미 천안유기동물보호소장 “재래종 고양이는 유해조수 취급...
외국 품종 고양이만 구조받는 현실 아이러니”
길에 피를 흘리고 쓰러진 고양이가 있다. 어떻게 도와야 할까? 하지만 시도 지자체의 유기동물보호소에 전화하기 전에, 고양이의 ‘품종’부터 확인해야 할 지도 모른다. 불합리한 일이지만, 고양이 구조는 ‘혈통 따라 달라지는’ 현실 때문이다. 외국 품종이면 구조하지만, 한국 재래종 고양이라면 외면받는다. 왤까.

2013년부터 천안유기동물보호소를 운영해 온 이경미 소장은 “대부분의 시도지자체에서 ‘한국 재래종 고양이는 길고양이로 간주’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2013년부터 농림부 관련법이 바뀌어서 길고양이는 유기묘가 아니라 ‘유해조수’로 분류하고 구조 대상 지원금을 주지 않고 있습니다. 차에 받혀 다리가 부러진 길고양이들도 많지만, 시 보호소에서 받지 못하니 개인 구조 외에 방법이 없어요.” 고양이가 멧돼지, 고라니 같은 유해조수로 분류됐다는 얘기다.

“일단은 품종이 외국이면 애완용으로 키우다 버린 유기묘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류하고 구조하고 있어요. 하지만 외국종만 구조대상이 된다니 참 아이러니한 일이지요. 샴과 코숏을 교배해도 외형은 코숏으로 나오는데, 어떤 종이 외국종인지 한국 고양이가 우성 발현한 것인지 알 도리가 없는 거 아닌가요.”

결국 고양이가 다쳐 있다는 신고가 들어오면 엉뚱하게도 ‘생긴 게 외국 고양이더냐’ 물어야 한다. ‘그럼 살아있는 애를 죽게 놔두라는 거냐’며 신고자들의 불만이 터져나온다. “다른 지자체에선 골치아파진다며 아예 고양이 구조는 안 받는 곳도 많아요. 시청 입장에선 수십만마리 길고양이들이 너무 많은 실정이고… 일단 현장에서 다친 고양이를 보면 집 고양이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도 데려오지만, 일일이 신고마다 다 출동할 수는 없으니 전화로 ‘길고양이는 안된다’ 말하고도 한동안 가슴이 아파요.”

그나마 다친 길고양이가 안쓰러워 전화를 걸어 온 사람이라면, 개인 구조로 연결될 가능성이나마 있다. 대개는 집 앞에 고양이가 피를 흘리고 누워 있으면 시청에 전화로 항의가 쏟아진다. “ ‘당장 와서 치워라’ ‘죽으면 니가 가서 데리고 갈거냐’ 고래고래 소리쳐서 가보면 대개 길고양이이고, 이미 숨이 끊어졌거나 끊기기 직전이라 편안히 갈 수 있도록 수습하는 일을 맡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어지간한 마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주인이 있는데도 버려지는’ 경우도 골칫거리다. “얼마 전 119에서 신고가 들어와 현장에 가 보니, 고층 베란다 난간 에어컨 실외기에 매달려 있어 119 대원들이 구조했대요. 그런데 주인을 알아보니 주인을 공격해서 주인이 병원에 입원했대요. 연락하니 주인이 ‘무서워서 집 안에 들일 수가 없다’고 했대요. 고양이가 뭔가 주인에게 화가 났던 모양이에요. 119 대원분들은 신고가 들어오면 다 나가야 하니, 주인이 있던 없던 간에 긴급구조가 되서 119 종합 상황실에서 포획구조하고 나면 주인이 나서지 않을 경우 무조건 제게 인계하는 거에요. 하지만 엄연히 주인이 있는데, 이건 명백한 유기잖아요.”

대개 시 보호소는 안락사 규정이 철저하지만, 비교적 안락사를 시키지 않으려는 보호소라는 소문이 나면서 아예 대놓고 키우던 고양이를 ‘버리러’ 오는 사람들도 있단다. ‘동물 유기죄’에 해당하지만, 일일이 민사소송을 걸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이경미 소장은 “아기 고양이가 예쁘다고 덜컥 키우다가 버리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발정기가 오면 난폭해지고 털이 빠지는 고양이를 감당하지 못하고 내버리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다행이를 이어준 사람2 : 강지영 자원봉사활동가 “걱정 많이 하고 보냈는데 적응 잘 하더라고요” 유기동물이 새 주인에게 가기 전엔 준비가 필요하다. 병이 있다면 치료를 마쳐야 하고, 중성화도 해야 하고, 사람과의 생활에 다시 적응할 수 있는 기간도 필요하다. 수십마리가 함께 지내는 보호소에서 입양 가는 고양이 하나에게 세심한 케어를 계속하긴 아무래도 무리다. 그래서 입양 전 ‘임시보호’를 해주는 자원 봉사가 절실하다. 다행이는 아픈 팔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코에는 까만 곰팡이가 올라와 있었고, 중성화도 미처 하지 못한 상태였다.

이 때 다행이의 임시보호를 맡았던 이가 바로 강지영 씨다. 강씨는 다행이를 역곡역으로 입양 보낸 징검다리다. 천안에 내려와 직장생활을 하면서 반려 동물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그는 곧 여러 활동가들과 친분을 쌓았다. ‘유기묘가 전철역 명예 역장이라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건네 듣고, 이경미 소장에게 연락한 것이 강씨였다.

강지영씨가 보호하던 시절의 다행이. 보호소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모습 보호소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모습. <강지영씨 제공>

2014년 4월초, 입양 대상 고양이로 거론된 다행이를 강지영씨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다. 다행이는 처음부터 자신의 집인 양 활보했다. 전철역으로 보내진다기에 걱정했는데,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하는 타입인 것 같아 안심이 됐다. “원래 고양이들은 잘 안 그러거든요. (여러 사람이 오가면)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텐데, 다행이는 왜 그런지 사람에게 사랑을 많이 받아봐서 좋은 기억이 있는 건지는 모르겠는데, 역에서도 적응을 잘 하더라고요. 걱정 많이 하고 보냈거든요.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데리고 온다고 생각하고 보낸 건데…”

입양
직전의 회복된 모습. 강지영씨 제공 입양 직전의 회복된 모습. <강지영씨 제공>

피부병 치료 때문에 등을 빡빡 깎인 짤막한 털을 쓸어 주면 다행이는 가르릉거리며 애교를 부렸다. 강씨의 보호 아래 무사히 중성화수술도 마쳤다. 한결 말끔해진 다행이는 동물운동가인 이정민씨, 김호중 애니멀아리랑 대표를 거쳐 역곡역으로 가게 될 것이었다.

처음으로

다행이를 이어준 사람3 : 방송인 이정민씨 “역곡역 고양이 역장 찾는 과정, 정말 감동적” 시원시원한 화법으로 예능 프로그램에도 출연해 인기를 모았던 미스코리아 이정민씨는 저명한 동물보호운동가다. 특히 안락사당할 가능성이 높은 6개월 이상의 오랜 기간 동안 치료가 필요한 유기견/유기묘의 입양에 힘쓰고 있다. 이씨도 후지마비된 8살짜리 고양이와 함께 지내고 있다.

방송인 이정민씨가 자신이 입양한 고양이를 안고 있다. 이정민씨 제공 방송인 이정민씨가 자신이 입양한 고양이를 안고 있다. <이정민씨 제공>

이씨도 강지영씨처럼 독립하면서 고양이를 키우게 됐다. 그러면서 애묘 카페 등을 통해 학대 사건 등을 자주 접했다. 처참한 모습을 보며 많이도 울었다. 그러다 “힘들다고 외면할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알리고 나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예계 활동과 개인 사업 등으로 다양한 인맥이 넓은 것이 동물보호운동을 펼치는 데 큰 장점이 됐다. 2012년엔 동물보호법 개정 운동을 추진한 공로를 인정받아, 동물사랑실천협회에서 수여하는 ‘동물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평소 알고 지내던 김호중 애니멀 아리랑 대표님께 ‘역곡역의 역장이 될 고양이를 찾는다’는 연락을 받고, 캣맘들에게 연락을 돌렸죠. 연결, 연결해서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카스(카카오스토리) 등을 통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나가는 과정은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그 중 한 흐름이 강지영씨를 통해 이경미 소장에까지 이어진 것.

“사회관계망서비스(SNS)가 발달하면서 예전보다 동물보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빠르게 퍼져나가는 것을 느껴요. 사회 인식이 달라져서 아이들은 저희때보다 아름다운 세상, 동물 보호가 인간 보호이기도 하다는 점을 알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길 바랍니다.”

처음으로

다행이를 이어준 사람4 : 김호중 애니멀 아리랑 대표 “약자를 돕는 마음” “‘아름다운 역무원’으로 알려진 김행균 역장이 마침 제 철도고등학교 선배셨어요. 이런 분이 아픔이 있는 고양이 한 마리를 품어줌으로 인해서 사회에도 큰 메시지를 던질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반년 가까이 졸랐어요.” 김호중 애니멀 아리랑 대표(47)는 ‘다행이 명예 역장 프로젝트’의 숨은 주역이다.

다행이 페이스북 팬 페이지.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다행이 페이스북 팬 페이지. 여러 자원봉사자들이 운영하고 있다.

그는 원래 위키트리 운영본부장 겸 편집장이었다. 한 방송프로그램이 연출을 위해 개를 학대했다는 의혹을 받은 ‘황구학대사건’ 취재중 동물보호운동 단체와 접점이 생겨 ‘동물보호단체 전문위원’으로 1년간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동물보호운동에 눈을 떴다. 2013년엔 동물복지단체인 ‘애니멀 아리랑’을 세웠다. 유기묘인 ‘다행이’의 입양을 추진하고, 페이스북으로 이름을 공모하자는 아이디어도 냈다. 그 뒤로는 다행이와 사랑에 빠져버린 이들이 스스로 나서면서 딱히 그가 할 일이 없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삽화도 그려서 올려 주시고, 그림책 기부하자는 얘기도 하고…. 감사할 뿐이죠. 다행이를 계기로 생명존중의식이 널리 뿌리내렸으면 하고 바랍니다.”

최근엔 독거노인을 대상으로 반려동물을 지원해 주는 사업을 진행중이다. 버려지거나 도살장 등에서 구조된 강아지들을,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는 노인들에게 연결해 주는 일이다. 개를 키워본 경험이 있고, 지금도 키우고 싶은데 매달 드는 돈이나 치료비가 부담돼 못 키우시는 분들을 대상으로 구조된 강아지를 치료를 마치고 가정에 연계해 준다. 지난달 덕양노인복지관을 통해, 오래도록 키운 개와 사별한 뒤 힘들어하는 한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저는 원래 사회복지 관련 일을 오래도록 해 오다 동물복지에도 관심을 갖게 된 경우입니다. 동물보호운동을 볼 때 사람들이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데 동물에게만 (사랑이)지나친 것 아니냐’는 시각이 있다는 사실을 잘 알지요. 하지만 동물을 돕는 마음은, 약한 사람을 돕는 마음과 결코 멀리 있지 않아요.”

처음으로

처음으로
철도원, 고양이를 부탁해
취재 정유경 기자
영상 조소영 피디
사진 조승현 기자
삽화 박다미(퍼엉)
제작 디지털기술부문

뉴스그래픽 더보기

처음으로
계속 보기